보릿고개의 조선
1897년, 조선은 큰 흉년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보릿고개를 넘었고, 영양실조와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었습니다.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는 아이가 많던 시절입니다.
대구는 전국의 약재가 모이는 약령시의 도시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은 먼 이야기였습니다. “약 한 첩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 흔하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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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플 스토리
1899년 대구 청라언덕에서 2026년 코플까지, 사과나무가 걸어온 길을 일곱 장으로 정리했습니다.
1897년, 조선은 큰 흉년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보릿고개를 넘었고, 영양실조와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었습니다.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는 아이가 많던 시절입니다.
대구는 전국의 약재가 모이는 약령시의 도시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은 먼 이야기였습니다. “약 한 첩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 흔하던 때입니다.

그해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되었고, 12월 24일 의료선교사 우드브릿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이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1899년 그는 대구에 약방을 열고, 이어 제중원을 열어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동산병원이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굶주린 환자들에게는 약만큼이나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이 필요했습니다. 1899년 10월, 존슨은 서울 선교부 연회에 다녀오는 길에 미국 미주리주로 사과나무를 주문했습니다.
묘목은 기차와 증기선, 연락선과 나룻배, 수레를 갈아타며 두세 달 만에 대구에 닿았습니다. 약품이 오가던 바로 그 길입니다.
1899년 12월, 청라언덕에 세 품종 72그루의 사과나무가 심겼습니다. 대구의 토종 능금나무와 미국 사과나무가 처음 만난 순간입니다.
몇 달씩 보관할 수 있는 사과는 제중원 환자들에게 꾸준히 나눠 줄 수 있는 귀한 영양이었습니다. 과수원은 9천 평까지 넓어졌고, 서문시장에서 사과를 맛본 사람들은 “꿀물이 들어 있는 신비한 과일”이라고 했습니다.
청라언덕의 이야기는 소년 마부 천복이와 능금이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1907년 정식 인가를 받은 신명여학교는 학생들에게 사과나무 접붙이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방학마다 고향 마을로 내려가 사과나무를 접붙였고, 그 수고는 학교 운영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청라언덕에서 시작된 사과나무가 경북 곳곳의 마을로 퍼져 나간 길입니다.



1910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지고, 존슨과 크리더스 선교사가 안동에 사과나무 접목법을 전했습니다. 서늘한 안동에서 사과는 수확한 뒤에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1916년 10월, 크리더스 선교사는 녹전교회 밭에 사과나무 100그루를 심었습니다. 안동 사과의 시작입니다. 1929년에는 녹전면 신평리에 80그루가 더해졌습니다.
안동(安東)은 ‘동쪽의 편안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코플은 이 땅의 사과로 만듭니다.




해마다 태풍과 우박 같은 자연재해로 떨어진 사과가 제값을 받지 못하고 버려집니다. 코플은 이 사과를 거두어 껍질째 통째로 담습니다.
코플(Korpple)은 Korea와 Apple을 합친 이름입니다. 1897년의 대한제국(Korea)과 1899년의 사과나무(Apple)에서 왔습니다.
이제부터 Apple이 아니라,
Korpple입니다.


청진기와 사과를 든 코플의 안내자. 1899년 청라언덕에 사과나무를 심은 의사입니다.
캄보디아에서는 홍보대사 짠다가 ‘사과미인 송’으로 코플을 알립니다.
코플이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으며, 항목별 출처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복원 이미지’와 ‘재현 이미지’는 옛 사진과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하거나 다시 그린 이미지입니다.